250317 해설이 있는 클래식 음악감상 _ 이건실 교수
완연한 봄으로 접어들었다.
남도의 봄은 참 아름답다.
최근 다른지역에 다녀왔지만 내가 터잡은 곳이 이곳이여서일까?
너무나도 광주전남은 매혹적이다.
두번째 음악감상... 요한세바스티안 바흐
Johann Sebastian Bach
(1685.3.31.~ 1750.7.28.)
인류가 낳은 음악의 아버지 바흐의 가계는 200년에 걸쳐 50명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대음악가계로서
일족은 모두 루터 정통파의 경건한 신자였다. 10세에 부모를 잃고 형의 집에서 자라며 클라비어를 배웠다.
그가 활약한 시기는 바이마르 궁정의 약 10년간과 라이프찌히 시대의 27년간이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라 하겠다.
바이마르 시대에는 실내악과 관현악 등을 많이 작곡 하였으며 라이프찌히 시대에는 칸타타, 오라토리오, 파시온 등
성악의 대작과 오르간곡 등을 많이 작곡했다. 그의 작품은 풍부 한 멜로디와 절묘한 대위법을 밑바탕으로
화성적인 수법을 가미시켜 복음악의 최고 경지를 이룩하고, 근대음악의 아버지라 일컬음을 받을 만큼 큰 업적을 남겼다.
그의 중요 작품은 약200의 교회 칸타타, 24곡의 세속 칸타타, 7곡의 모텟토와 12곡의 미사 마니피카트,
4곡의 수난곡 및 오라토리오, 81곡의 오르간곡, 116곡의 클라비어곡, 6곡의 류트곡, 39곡의 실내악곡
29곡의 협주곡과 관현악곡, 그 외 9곡의 특수작품 등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바흐는 1685년 3월21일 튀링겐주 아이제나하에서 태어났다.
1707년 월하우젠의 블라지우스 교회당 오르간 주자로 부임하고, 그 고장에 서 육촌 누이동생 마리아 바흐와 결혼했다.
교회의 오르간 주자라 는 지위는 당시의 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자리의 하나로, 특히 음악이 교회 모든 의식에 쓰였던
그리스도교에서는 음악이 교회당의 성쇠를 좌우했던 것이다. 오르간 주자는 음악장으로서, 성가대의 지도, 훈련,지휘를
담당하고 또 예배악곡을 작곡했다. 바흐가 수많은 예배 악곡을 남긴 것은 첫째로 그의 이러한 직책 때문이며,
또 그 의 두터운 신앙심에서 이런 숭고한 예배곡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바흐는 뮐하우젠에 있는 동안 유명한 토카타와 푸가(BWV 565)와 첫 칸타타를 작곡했습니다.
그는 그 다음 1708년에 작센-바이마르 공작의 직위를 맡아 궁정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고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했으며
1714년에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오르겔-뷔클라인을 포함하여 많은 오르간 작곡을 썼습니다.
바흐는 바이마르를 떠나 1717년 12월 쾨텐의 카펠마이스터라는 직위를 확보했습니다.
1720년, 바흐의 아내가 갑자기 사망하여 그에게 네 명의 자녀가 남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두 번째 아내인 소프라노 안나 막달레나 빌케를 만나 1721년 12월에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13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그중 다섯 명만이 어린 시절을 견뎌냈습니다.
다른 많은 세속 작품들과 함께 여섯 개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WV 1046-51)은 그의 쾨텐 시절에 작곡되었습니다.
바흐는 1723년 5월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교회 칸토르가 되었고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토마스교회 감독직은 당시 바흐보다 훨씬 유명했던 스타 텔레만이 고사한 직책이었다.
시청기록으로 남아있는 자료에 의하면,
"탈레만같은 사람이 왔어야 했는데...어쩔수없이 할 사람이 없어서 임명한다"라고 쓰여있다.
당시 바흐는 외국에도 못가보았지만, 끊임없이 익히고 받아들인 3류급의 음악가로 사람들에게 잊혀졌던건이다.
바흐는 1740년대에 베를린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의 아들 칼 필 리프 에마누엘이 그곳에서
궁정 음악가로 일했기 때문이었다.
인류의 유산 바흐의 작품들은 그가 사망하고 100여년후 멘델스존에 의해서 발굴된 것 들이다.
마지막 작품 중에는 1749년 B단조 미사곡이 있다. 신앙심 깊은 온건주의자였던
그는 당뇨병에 시달려 1750년 7월 28일에 사망했다.